[특별기획 : 시간여행] 16년 전, 우리는 히딩크를 얼마나 믿었을까?

사진: 네이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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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국 축구의 운명을 바꾼 남자, 거스 히딩크

2001년 1월 10일. 2002 한·일월드컵에 나설 대표팀을 맡기로 계약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자신을 보좌할 핌 베어벡 코치, 얀 룰프스 코디네이터와 함께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2000년 12월 17일 대한축구협회와 계약을 체결한 그는 2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을 박항서 수석코치에게 맡긴 채 관중석에서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다. 네덜란드로 돌아가 월드컵 성공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뒤 3주 만에 돌아온 그는 울산에서 열린 대표팀 첫 소집에 돌입했다. 그는 “한겨울 얼어 있는 그라운드 위에서도 슬라이딩 태클을 불사하는 한국 축구 특유의 정신력으로부터 성공의 희망을 발견했다”는 말로 첫 소감을 밝혔다.

2002년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는 초조했다. 일본으로 치우친 판세를 뒤집고 유치한 한·일월드컵은 아시아 대륙에서 최초로 열리는 세계 축구의 축제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국가 위상 향상과 우리의 사회의 방향까지 바꿨던 것은 감안하면, 올림픽 이상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월드컵과 관련된 문제는 국가적 과제로 직결됐다. 가장 큰 고민은 성적이었다. 대회까지 4년을 앞둔 프랑스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2년 앞으로 다가 온 상황에서 치른 시드니올림픽에서도 조별리그에서 좌절했다. 한국 축구의 아이콘인 차범근과 허정무 두 감독은 그 과정에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야 했다. 라이벌 일본이 일찌감치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하며 세계의 벽을 서서히 넘어서고 있던 터라 상황은 더 심각하게 비교됐다.

개최국이 16강(2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한 경우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대로는 어렵사리 유치한 월드컵에서 망신만 당한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했다. 위기감 속에 한국 축구가 택한 것은 ‘다시 한번’ 외국인 감독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이었던 디트마르 크라머(독일),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을 이끈 아나톨리 비쇼베츠(구 소련, 우크라이나)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내분과 불신으로 결과는 내지 못했다. 국제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거물 지도자 박종환, 차범근, 허정무가 연달아 실패를 하자 ‘세계적인 지도자만이 한국 축구를 구할 수 있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그렇게 대한축구협회는 유럽의 명망 있는 지도자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가삼현 당시 국제부장(현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영입전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용수 위원장은 세계적으로 검증된 지도자 중 대표팀을 맡을만한 인물을 추천하고, 가삼현 부장은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접촉하고 협상을 가졌다. 대한축구협회가 원했던 최우선 대상자는 히딩크 감독이 아니었다. 프랑스월드컵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에메 자케 감독이 첫 후보였다. 하지만 자케는 월드컵을 끝으로 현역 감독에서 물러나 프랑스 축구협회의 기술위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터라 고사했다.(실제로 2006년 축구 현장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았다)

차선책이 바로 히딩크 감독이었다. 조금은 놀라운 선택이기도 했다.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에게 세계와의 격차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차범근이라는 한국 축구의 영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비극의 계기를 제공한 이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 4강에 진출하며 주가가 치솟았던 콧수염의 히딩크 감독은 세계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8개월 만에 물러나는 실패를 맛봤다. 뒤 이어 부임한 레알 베티스에서도 단명했다. 프리메라리가에서의 거듭된 실패로 야인 신세가 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의 러브콜에 관심을 보였다. 월드컵을 1년 6개월여 앞두고 적신호가 켜진 한국 축구, 감독 커리어에서 유일한 연속 실패로 최저점에 떨어져 있던 거스 히딩크. 위기에 처해 있던 둘은 한·일월드컵 성공이라는 대반전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 전까지 어떤 감독도 받아보지 못한 지원을 했고,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방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여론의 견제를 돌파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 세계는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쓴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변화를 주목했다. 그의 통렬한 어퍼컷이 나올 때는 우리의 자존감도 일어섰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뒤 세계라는 높은 벽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던 한국 축구가 반세기 만에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히딩크 매직’은 한국 축구의 전설이자 고유명사로 남게 됐다. 그 매직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진: 네이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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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 하나, 화려한 언변과 능숙한 심리전

어휘와 표현력은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다. 직관적이고 명료한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하나를 통해 대중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뛰어난 리더는 늘 화려한 언변을 지녔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 비유적으로 표현해 상대 뇌리에 꽂는 설득력이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능력도 빛나지 못한다. 객관적이어야 하고, 인과관계를 잘 포장해야 한다. 단호함도 필요하다. 윈스턴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는 대척적인 지점에 섰지만 탁월한 연설 능력을 지닌 리더였다. 넬슨 만델라도 그랬다.

축구계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경험, 거기서 빚어진 확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감독이라는 리더의 그릇을 보여준다. 히딩크 감독이 그 대표격이다. 따뜻한 희망과 냉철한 현실을 오가는 그의 언변은 1년 6개월 동안 한국 축구를 강하게 제련했다. 울산에서 선수들을 처음 만난 뒤 “월드컵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한 한국 축구의 습관을 바꿔 놓겠다”라는 말로 자신의 비젼을 명확히 던졌다. 본선까지 가는 과정에서 히딩크호가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평가전에서 패하면 언론과 대중의 반응은 요동쳤다. 그럴 때일수록 히딩크 감독은 찬물을 끼얹었다. “오늘의 패배가 미래의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결과에 관계 없이 좋은 경기였다”라는 말과 함께 왜 내용이 좋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반박했다.

“나는 어느 팀도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팀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시밭길을 걷겠다. 격차를 좁히려면 강호들과의 대결을 피해선 안 된다”, “16강 이상을 바라보는 중이다.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말은 희망과 현실 감각을 모두 담고 있었다. 성공을 거두면 자신의 선택을 감추지 않고 자랑했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자 히딩크 감독은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목표였던 1승과 16강이 모두 달성된 뒤 외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말은 히딩크라는 리더의 매력을 모두 끄집어 낸 폭발력이 있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는 선수들을 불러 모아 "역사를 만들어보자"는 말로 팀의 동기부여를 끌어냈고 4강까지 진격했다.

그가 남긴 짧고 명료한 표현은 15년이 지난 현재도 한국 축구가 정체성을 찾는 힌트로 애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킬러 본능(Killer Instinct)이다.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한국 축구의 고질병은 히딩크 감독도 쉽게 풀지 못한 고민이었다. 황선홍이라는 대표 골잡이가 참가하지 못한 2002년 1월의 골드컵에서 득점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히딩크 감독이 “킬러 본능이 필요하다. 이 나이에 내가 뛸 수도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며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 한 선수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도 지금은 익숙하지만 히딩크 감독에 의해서 애용되기 시작했다. 그 밖에 “경기 중에 변속 기어 역할을 할 선수(안정환)가 필요하다”처럼 일상적인 표현을 축구에 빗댄 방식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심리전의 대가기도 했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밀당(밀고 당기기)’에 능했다. 홍명보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과감하게 제외하는가 하면, 대표팀에 그의 리더십이 필요하자 맞춤 전술까지 제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딩크 감독의 첫 경기였던 칼스버그컵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골키퍼 김병지는 언론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불러들여 이운재와 유례 없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 본선 동안 골키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박지성, 송종국, 이영표 등 자신감이 부족했던 젊은 선수들에겐 무한 신뢰를 통해 잠재력을 끌어냈다. 밀당은 선수들뿐만 아니라 언론과의 관계에도 적용됐다. 팀이 부진할 때 언론으로부터 선수와 갈등, 항명설, 여자친구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알렉스 퍼거슨, 주제 무리뉴 감독이 흔히 쓰는, 언론을 외부에 존재하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선수단의 결집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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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 둘, 목표를 향해 걸어간 ‘My Way’

히딩크 감독의 애창곡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불후의 명곡 ‘마이 웨이(My Way)’다. 코칭스태프와 함께 한 기분 좋은 자리에서, 16강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 위한 신년 산행이 끝난 뒷풀이에서, 월드컵이 끝난 뒤 가진 대국민환영행사에서도 그는 마이크가 넘어오면 언제나 그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펴 낸 자서전의 제목도 동일했다.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도 제법 있었지.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었고, 예외 없이 끝까지 해냈어’라는 가사는 히딩크 감독의 인생, 그리고 직업에 대한 신념을 대변하는 듯 했다.

월드컵까지의 1년 6개월 동안 히딩크 감독이 거침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가까웠다. 두 차례 큰 위기가 있었다. 1월 칼스버그컵을 시작으로 두바이컵, LG컵 4개국 대회를 거치며 선수단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은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치르게 됐다. 첫 경기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프랑스였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지단, 바르테즈, 앙리, 트레제게 등 주력 선수가 빠진 프랑스에게 0-5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어진 멕시코, 호주와의 경기에서 투지를 발휘하며 승리를 거뒀지만 공동개최국인 일본(결승 진출)과 달리 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하고 말았다. 8월 있었던 유럽 원정에서 0-5의 악몽은 재현됐다. 파벨 네드베드, 얀 콜러, 밀란 바로시, 토마스 로시츠키 등 주력 선수를 총출동시킨 체코를 상대로 전반엔 선전했지만 후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당시 언론은 히딩크 감독에게 ‘오대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였다.

2001년 후반기엔 속속 완공된 월드컵을 위한 새 경기장에서 나이지리아, 크로아티아, 세네갈, 미국과 평가전을 갖고 3승 2무 1패의 호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월드컵을 불과 5개월여 앞둔 2002년 2월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매번 답답한 경기를 했다. 대회 종료 후 몬테비데오로 이동해 치른 평가전에서도 우루과이에게 1-2로 패했다. 긴 합숙 훈련과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1승도 거두지 못한 한달여의 원정이 끝나자 지금이라도 히딩크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었다. 국내 지도자들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강한 비판을 했다. 히딩크 감독을 옹호하고 계속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이용수 기술위원장, 차범근, 이회택 정도의 극소수 축구인이었다.

캐나다, 쿠바, 코스타리카를 꺾지 못하는 판에 당장 5개월 뒤 세계적인 강호를 상대해야 하는 무대에서의 성공을 장담할 이는 없었다.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신경질적인 우려를 넘어 ‘월드컵에서 실패할 수 있다’라는 공포가 확산됐다. 다행이라면 그런 분위기에 축구협회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축구협회와 히딩크 감독의 가교였던 이용수 위원장과 가삼현 국제부장은 “여기까지 와서 감독을 교체할 순 없다”는 강한 입장을 나타냈다. 정작 히딩크 감독 본인은 그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북중미와 남미 전지훈련의 목적은 결과가 아니었다. 월드컵에 함께 갈 선수들을 가려내고 다양한 전술 실험을 하며, 선수들의 피지컬적 내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 시기는 대표팀의 사이클상 최저점이었고 그 뒤부터 대표팀의 경기력은 상승 곡선을 탔다. 황선홍, 홍명보, 최용수가 본격 합류한 3월 유럽 원정에서 핀란드를 꺾고, 터키를 상대로 좋은 내용을 보여주며 비겼다.

국내로 돌아와 코스타리카, 중국을 상대로 한 평가전을 마무리한 히딩크 감독은 4월 30일 운명의 최종엔트리를 발표했다. 이동국, 김용대가 탈락하고 차두리, 최은성이 선발됐다. 월드컵, 챔피언스리그 등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을 체득해 온 히딩크 감독은 조직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선수, 그리고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폭발적인 무언가를 지닌 스페셜리스트를 적절히 더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16강 진출 가능성을 매일 1%씩 높여가겠다. 월드컵이 되면 우리의 힘이 폭발할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말대로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유럽 팀과의 세차례 평가전에서 대표팀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스코틀랜드를 완파하고, 잉글랜드와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1년 전 0-5 완패를 당한 프랑스를 상대로는 한때 2-1로 경기를 리드하는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2-3으로 석패했다. 히딩크 감독이 원했던 팀의 완성이 월드컵에 즈음해 증명되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은 개최국의 부담감을 책임감과 이점으로 역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취임 당시 축구협회에 “훈련 시간을 무제한으로 보장해달라. 전세계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실상 감독 영입 요청을 거부한다는 완곡한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대한축구협회는 그 조건을 수용했다. 역대 대표팀의 어떤 감독에게도 보장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약속을 했다. 히딩크 감독이 단기간에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린 대가로 K리그가 파행 운영되고 선수들은 수시로 장기 합숙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분명 비정상적인 지원이었지만 당시엔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월드컵 성공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청와대로 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월드컵 16강 가능성을 직접 브리핑해야 했던 시기다. 히딩크 감독은 전폭적인 지원이 약속된 상황에서 세계 일류 감독만이 아는 성공의 방식(The Way)을 더했다. 홈 이점도 확실히 이용했다. 붉은악마를 통해 대대적인 응원 분위기로 상대를 압박하게 해 달라고 했다. 평소 대표팀이 훈련해서 익숙한 잔디 길이를 실제 경기장에도 적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했다.

사진: 네이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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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 셋,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세계로

히딩크 감독은 편견을 깨는 것을 즐겼다. 월드컵 동안 수석코치로 그를 보좌했던 박항서 전 상주 감독은 “사고 방식이 달랐다. 어느 날 티타임 중 물컵을 엎지르면 어떻게 하겠냐고 코치들에게 물었다. 다들 빨리 컵을 세우고 물을 닦을 거라고 했다. 그러자 히딩크 감독은 테이블 한쪽을 들어올려 물을 반대로 흘러내리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목적을 위해선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할 수 있는 사고. 그것이 히딩크 감독의 무기였다.

한·일월드컵에서 성공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는 세계 축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우리는 체력은 좋은데 기술이 한참 밀린다”라며 격차를 인정했다. 히딩크 감독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 축구의 기술은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요구하는 축구를 수행하는 데 충분한 레벨의 기술을 갖고 있고, 오히려 양발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선수들의 특성은 매력적이라고 봤다. 그는 반대로 체력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심층적인 관점에서의 체력을 말했다. 무작정 뛰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가 그 체력을 컨트롤하지 못해 후반 막판이 되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 그리고 스피드에 비해 떨어지는 파워와 지구력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것을 위해 체계적인 피지컬 훈련과 측정된 데이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선수와 한국 축구의 특성, 장단점에 대한 파악이 끝나고 월드컵을 6개월여 남긴 시점에서 그는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피지컬 코치를 불러들여 체력 증강을 완성시켰다.

팀의 사고도 바꿨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가 가진 조직에 대한 헌신, 선수 개인의 내적 동기부여에는 후한 점수를 뒀다. 반면 선수 간의 의사소통과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도는 떨어진다고 봤다. 장시간 관찰한 끝에 그는 한국 사회의 주요 문화인 예절과 위계가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결론을 냈다. 그러면서 그라운드 위에서는 존댓말을 쓰지 말 것을 지시했다. 선후배가 각각 나눠져 하는 식사 문화도 바꿨다. 팀 동료들 간에 유럽식의 수평적 관계를 도입했다. 홍명보, 황선홍 같은 팀 내 리더의 영향력은 존중하되 그라운드 위에서의 기능을 위한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선진축구를 위해서 포백을 해야 한다는 한국 축구의 집착도 고정관념임을 보여줬다. 스위퍼 시스템의 쓰리백을 오랜 시간 주로 써 온 한국 축구는 몇몇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포백 시스템을 제대로 가동도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공간과 압박이라는 개념에 접근하지 못했다. 프랑스월드컵의 실패를 분석하면서 ‘쓰리백 시스템에서 탈피해야 한국 축구의 선진화가 이뤄진다’는 주장이 많았다. 때문에 젊은 지도자들은 차별화를 위해, 변화를 위해 익숙하지 않은 포백을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확실히 포백은 쓰리백과 비교해 유연한 대응과 능동적인 전술 변화가 수월하다. 히딩크 감독도 부임 후 4-4-2 포메이션을 가동하며 포백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한국 수비수들의 특징과 홍명보라는 경기 내외적인 축을 활용해야 한다는 판단에 다시 쓰리백으로 돌아갔다. 대신 스위퍼 시스템 대신 일자 형태의 플랫 쓰리백을 적용했다. 상대 공격 숫자에 따라 포백으로 용이하게 변화하고, 오프사이드 트랩 실패 가능성을 줄인 대안이었다. 수비라인을 전진시키고 간격 유지를 강조하며 압박의 효과도 높였다. 이 전술이 본격화되며 2002년 3월 유럽 원정과 4월 평가전에서 5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히딩크 감독의 낙점을 받은 플랫 쓰리백은 본선에서 대표팀이 성과를 내는 중요한 무기가 됐다.

파격적인 묘수에도 능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상징적인 경기로 꼽히는 이탈리아전은 히딩크 감독의 능수능란한 전술가적인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다. 0-1로 뒤진 채 이탈리아의 빗장수를 깨지 못하자 후반 18분 김태영을 빼고 황선홍을, 5분 뒤 김남일을 빼고 이천수를 투입했다. 여기서 히딩크 감독이 강조한 멀티 플레이어의 개념이 빛난다. 미드필더인 유상철이 수비로 내려가고, 김남일의 자리엔 송종국이 선다. 후반 38분에는 홍명보마저 빼고 차두리를 넣었다. 송종국이 수비로 내려가야 하자 그 자리에는 박지성이 섰다. 공격 숫자를 무수히 늘리면서도 최소한의 수비 밸런스를 유지한 것이다. 최종엔트리 발탁 당시 모두가 의아해 했던 차두리의 가치도 이 경기에서 빛났다. 지친 이탈리아 수비진을 상대로 측면을 내달리며 이천수와 함께 부수기 시작했고 균열이 생겼다. 결국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이 나왔다. 연장 들어서도 치고 받는 승부가 계속됐고 결국 안정환의 헤딩 골든골이 나오며 한국 축구사상 가장 극적인 승리가 완성됐다.

히딩크 감독은 부임 후 줄곧 선수들에게 냉정한 판단으로 자신과 팀을 컨트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과 체력은 상대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된 전술을 지탱하기 위함이며 그것일 위해 오차 없이 움직이는 토탈사커를 도입했다. 이탈리아전은 그런 히딩크 감독의 축구가 가장 완벽하게 수행된 대표작이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이 깨워주고 간 개념과 사고로부터 크게 진화하지 못한 모양새다. 그만큼 그의 성공과 영향력이 강렬했다는 얘기다.

사회적인 파급력도 컸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과 능력으로 변화된 대표팀은 문화, 정치, 경제의 좋은 본보기가 됐다. 월드컵을 치르는 2002년 6월 한달 간 대한민국은 모두가 환희와 열정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대를 살았기에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갔다. 언젠가는 그 시대를 돌아볼 '응답하라 2002'가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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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이후 히딩크 감독, 그리고 한국 축구

히딩크 감독은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네덜란드로 돌아가며 박지성과 이영표를 데려갔고 두 선수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하며 한국 선수들의 유럽 러시를 촉발시켰다. 한국 대표팀을 맡아 자신의 운명도 바꾼 히딩크 감독은 이후 PSV 에인트호벤, 호주 대표팀, 러시아 대표팀, 첼시, 안지 마하치칼라를 맡으며 인상적인 성과를 남겼다. 한편으론 터키 대표팀과 가장 최근의 네덜란드 대표팀처럼 실패를 맛 보며 지도자로서의 현역 은퇴도 가까워지고 있다. 현재는 2009년에 이어 다시 한번 첼시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해 위기의 팀을 구해 낼 구세주로 주목 받고 있다. 누구보다 바쁜 60대를 보내고 이제 만 70세를 앞두고 있는 히딩크 감독은 매년 한두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다양한 사회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반면 한국 축구는 지난 12년 간 히딩크 감독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다시 16강에 진출하고 많은 선수들을 유럽에 진출시키며 세계 축구 내에서 한국의 위상과 입지는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많은 후임 지도자들은 히딩크 감독이 이룬 성과에 근접하지 못하며 중도에 물러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007년 핌 베어벡을 끝으로 7년 간 지속됐던 외국인 감독사는 끝났고 이후 허정무,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로 이어지는 국내 감독 시대가 펼쳐지기도 했다. 그 중 성공이라 할 만한 결과를 낸 것은 허정무 감독 뿐이었고 나머지 감독은 대표팀에서 참담한 상황을 맞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2014 브라질월드컵 실패 후 한국 축구는 다시 외국인 감독 체제로 돌아갔다.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2018 러시아월드컵을 목표로 대표팀을 재건 중이고 현재까지는 순조로운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