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 둘, 목표를 향해 걸어간 ‘My Way’
히딩크 감독의 애창곡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불후의 명곡 ‘마이 웨이(My Way)’다. 코칭스태프와 함께 한 기분 좋은 자리에서, 16강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 위한 신년 산행이 끝난 뒷풀이에서, 월드컵이 끝난 뒤 가진 대국민환영행사에서도 그는 마이크가 넘어오면 언제나 그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펴 낸 자서전의 제목도 동일했다.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후회도 제법 있었지.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었고, 예외 없이 끝까지 해냈어’라는 가사는 히딩크 감독의 인생, 그리고 직업에 대한 신념을 대변하는 듯 했다.
월드컵까지의 1년 6개월 동안 히딩크 감독이 거침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가까웠다. 두 차례 큰 위기가 있었다. 1월 칼스버그컵을 시작으로 두바이컵, LG컵 4개국 대회를 거치며 선수단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은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치르게 됐다. 첫 경기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프랑스였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지단, 바르테즈, 앙리, 트레제게 등 주력 선수가 빠진 프랑스에게 0-5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어진 멕시코, 호주와의 경기에서 투지를 발휘하며 승리를 거뒀지만 공동개최국인 일본(결승 진출)과 달리 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하고 말았다. 8월 있었던 유럽 원정에서 0-5의 악몽은 재현됐다. 파벨 네드베드, 얀 콜러, 밀란 바로시, 토마스 로시츠키 등 주력 선수를 총출동시킨 체코를 상대로 전반엔 선전했지만 후반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당시 언론은 히딩크 감독에게 ‘오대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였다.
2001년 후반기엔 속속 완공된 월드컵을 위한 새 경기장에서 나이지리아, 크로아티아, 세네갈, 미국과 평가전을 갖고 3승 2무 1패의 호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월드컵을 불과 5개월여 앞둔 2002년 2월 두번째 위기에 직면한다.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매번 답답한 경기를 했다. 대회 종료 후 몬테비데오로 이동해 치른 평가전에서도 우루과이에게 1-2로 패했다. 긴 합숙 훈련과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1승도 거두지 못한 한달여의 원정이 끝나자 지금이라도 히딩크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었다. 국내 지도자들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강한 비판을 했다. 히딩크 감독을 옹호하고 계속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이용수 기술위원장, 차범근, 이회택 정도의 극소수 축구인이었다.
캐나다, 쿠바, 코스타리카를 꺾지 못하는 판에 당장 5개월 뒤 세계적인 강호를 상대해야 하는 무대에서의 성공을 장담할 이는 없었다.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신경질적인 우려를 넘어 ‘월드컵에서 실패할 수 있다’라는 공포가 확산됐다. 다행이라면 그런 분위기에 축구협회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축구협회와 히딩크 감독의 가교였던 이용수 위원장과 가삼현 국제부장은 “여기까지 와서 감독을 교체할 순 없다”는 강한 입장을 나타냈다. 정작 히딩크 감독 본인은 그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북중미와 남미 전지훈련의 목적은 결과가 아니었다. 월드컵에 함께 갈 선수들을 가려내고 다양한 전술 실험을 하며, 선수들의 피지컬적 내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 시기는 대표팀의 사이클상 최저점이었고 그 뒤부터 대표팀의 경기력은 상승 곡선을 탔다. 황선홍, 홍명보, 최용수가 본격 합류한 3월 유럽 원정에서 핀란드를 꺾고, 터키를 상대로 좋은 내용을 보여주며 비겼다.
국내로 돌아와 코스타리카, 중국을 상대로 한 평가전을 마무리한 히딩크 감독은 4월 30일 운명의 최종엔트리를 발표했다. 이동국, 김용대가 탈락하고 차두리, 최은성이 선발됐다. 월드컵, 챔피언스리그 등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을 체득해 온 히딩크 감독은 조직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선수, 그리고 경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폭발적인 무언가를 지닌 스페셜리스트를 적절히 더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16강 진출 가능성을 매일 1%씩 높여가겠다. 월드컵이 되면 우리의 힘이 폭발할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말대로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유럽 팀과의 세차례 평가전에서 대표팀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스코틀랜드를 완파하고, 잉글랜드와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1년 전 0-5 완패를 당한 프랑스를 상대로는 한때 2-1로 경기를 리드하는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2-3으로 석패했다. 히딩크 감독이 원했던 팀의 완성이 월드컵에 즈음해 증명되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은 개최국의 부담감을 책임감과 이점으로 역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취임 당시 축구협회에 “훈련 시간을 무제한으로 보장해달라. 전세계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실상 감독 영입 요청을 거부한다는 완곡한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대한축구협회는 그 조건을 수용했다. 역대 대표팀의 어떤 감독에게도 보장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약속을 했다. 히딩크 감독이 단기간에 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린 대가로 K리그가 파행 운영되고 선수들은 수시로 장기 합숙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분명 비정상적인 지원이었지만 당시엔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월드컵 성공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청와대로 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월드컵 16강 가능성을 직접 브리핑해야 했던 시기다. 히딩크 감독은 전폭적인 지원이 약속된 상황에서 세계 일류 감독만이 아는 성공의 방식(The Way)을 더했다. 홈 이점도 확실히 이용했다. 붉은악마를 통해 대대적인 응원 분위기로 상대를 압박하게 해 달라고 했다. 평소 대표팀이 훈련해서 익숙한 잔디 길이를 실제 경기장에도 적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했다.